정배의 성탄, 그리고 메리 크리스마스                 

                                                                                                                                      Beatrice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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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마스이브에 찾아온 12살 정배는 거실의자에 계속 앉아있었다.

아버지를 만나려고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진짜 아들이 아니다. 사실은 양아들도 아니었다.

거실에는 내가 틀어둔 캐롤이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정배라는 아이는 양손을 모아 붙잡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을 감다시피 하고 있었다. 저녁 찬을 준비하는 부엌소리와 함께 따뜻한 미역국 냄새가 났다.

 

정배는 고아원에서 살고 있는 남자아이였다. 영아원에 있다가 심한 화상흉터 때문에 입양되지 못하고 고아원으로 옮겨 지내고 있었다. 어느 해, ‘불우이웃돕기 일가족일인 결연식을 한 뒤로 우리가족과 인연이 닿았다. 자세히 모르지만 정배의 사연이 너무도 애처러워 용돈을 좀 대주고 학용품처럼 필요한 것도 보내주었다. 남동생과 동갑이었는데 덩치가 훨신 적어서 작아진 옷과 신발들은 으레 정배에게 보내주었다. 가끔은 하교길에 들러 용돈 받아가는 것이 보였다. 그렇다 한들 아직까지 정배는 친해지지 못하고 서먹하게 우리집에 다녀가곤 했다.

 

갑자기 정배가 일어섰다. 누군가가 오는 기척을 나보다 먼저 느끼고 거실창문을 바라보았다. 외출에서 돌아온 아빠는 겉옷에 붙어온 냉기를 벗어걸면서 정배에게 안부를 물으셨다. 뒤따라온 남동생은 심기가 불편한 듯 입을 한번 삐죽거리고는 엄마를 부르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정배가 왜 아직도 안가냐고 하면서 볼멘소리 하는 것이 내쪽에서 들렸다. 정배가 지난 5월 어버이날에 보내온 감사편지에는 우리 부모를 자기도 호부호모 하고 싶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고마움이라는 글속에 그는 양아들이라도 되고 싶은 모습이 역력했다. 이 글 또한 얼마나 용기를 내어 썼을까만은, 그 내용을 알게 된 동생은 정배를 더욱 적군대하듯이 했다.

 

대가족의 면모가 성가대회를 빛내는 맛인지라 한자리에 모이길 기다렸던 삼촌들과 고모도 이내 도착했다. 들리던 캐롤이 소란에 잠시 묻혔다. 장난끼 많은 막냇삼촌은 큰아들이 왔냐며 친하게 대해주려고 했다. 둘이 몇 달 차이로 생긴 별명이었다. 뿌루퉁한 동생은 정배의 존재에 거북한 본능을 표 내었다.

 

온천 같은 밥상에 둘러앉았다. 노래 부를 배를 온기로 먼저 불리었다정배는 누군가 거는 말에 예의상 짧은 대답만 하고는 말없이 먹는다이미 어두워진 밖은 화기애애한 우리의 저녁과 많이 달랐다정배 처지가 우리가족 분위기와 사뭇 다르듯이 침묵과 소란의 언어가 서로 교차되었다이름대신 큰아들이라고 아예 대놓고 불러대는 삼촌은 정배가 아빠와 닮은 것도 같다면서 숨겨놓은 진짜 아들 아니냐며 농을 했다. 밥 먹다 말고 모두 하하 웃었는데, 웃는 소리가 더 싫게 느껴진 동생은 얼굴을 구기며 입술을 실룩거리더니만,

정배가 뭔데 자꾸 그래요. 뭔데?”

하며 땅벌 날 듯 들었던 숟가락을 탕하고 상위에 내리쳤다.   

우리모두는 넋살 좋은 삼촌이 재미있게 하는 말인줄 알고 받아 넘겼지만 철없는 남동생은 그렇지 못했다. 자기 입던 옷을 입고 아빠 옆에 앉아 밥을 먹는 정배가 입안의 가시 같았나 보다. 엄마가 삼촌을 꾸짖는 흉내를 내고 동생도 토닥거리며 무마시켰다.

 

이번 성탄절 합창대회에 같이 해보자고 말한 것은 정배에게도 묘한 기분인 것 같았다. 정배는 아빠만 살짝 만나 용돈만 받고 돌아가기를 바랬을지 모른다. 어떤 마음이 정배를 우물쭈물하게 만들었는지 몰라도 결국은 함께 호흡을 맞추고 노래연습을 몇 번하였다. 그리 대단한 대회는 아니지만 무대에 올라선다는 긴장감으로 괜시리 설레었다. 정배는 몇 곱절 더 해 보였다.

 

제시간에 도착하여 가족팀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우리가족 순서가 되어 일어서려고 했을 때, 우연히 정배의 목덜미로 드러난 흉터의 끝자락을 보고 말았다. 제비초리를 태워먹고 그 부분을 머리카락 길러서 덮어 감춘 장면은 등에서 배로 팔로 온몸에 눌어붙어 있다고 들은 얘기를 떠올리게 했다. 마치도 화마에 휩싸인 급박한 상황이 눈앞에 펼쳐진 것 같았다.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고맙게도 옷이라는 것이 있어서 둘러싸고 감춰줄 수 있겠지만, 영혼에 남은 상처는 어쩌나 연민스러웠다.  

처음에 정배는 꾸어놓은 보리자루가 입만 벌리듯 줄구멍나지 않게 눈메우고 서 있었는데, 한두소절 지나자 온갖 번민을 잠시 잊은 듯 제법 큰소리를 내었다. 하루종일 우리식구들과 지내면서 마음이 따뜻해진 탓일까 열심이었다. 경배노래를 열심히 불러서 하느님 마음에 들고 싶어 하는 것 같기도 했고, 말하고 싶은 것을 노래로 대신 하는 것 같기도 했다.  

두번째로 자유곡을 합창할 때 정배고개는 계속 아래를 보고 있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궁금하여 옆눈으로 살짝 보았다. 훌쩍이는 것이 콧물을 흘리는가 싶었는데 볼을 타고 내려오는 것이 턱끝에서 뚝뚝 뜯고 있었다. 조명그림자에 담긴 얼굴은 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웃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부르면 살구빛 탐스럽게 잠든 귀한 아기가 떠오른다. 정배에게도 고운 아기 시절이 있었으니 사고로 모든 것을 잃은 서러움과 외로움에 빠진 마음을 추스리느라 평생을 애쓰며 살아갈 것이다. 크리스마스에 오시는 왕이 모든 것을 다 원래대로 되돌이켜 줄 수 있기를 갈망하고 기도 했으리라.

 

노래가 끝나고 자리로 돌아와 앉을 때 보니 정배는 언제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비어있는 정배의자가 집으로 가는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듯 했다.뒤늦게 원장과 통화가 되고나서야 정배가 생각하는 자기자리로 돌아갔다는 것을 알았다.  

결연 맺은 불우아이를 가정으로 초대해서 가족의 사랑을 느끼게 해주자는 취지는, 사실상 외롭게 살아가는 아이들이 위화감을 느끼고 더 위축된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가슴에 똑 같은 꽃을 달고서 한 가족이 된 착각으로 성가를 불렀던 정배의 감개는 어떠 했을까.

존재하지 않는 현재를 가공했을까, 사라지고 없는 미래를 체험했을까.

 

다행히 정배는 그 후에 세배하러 왔고 떡국도 먹었다크리스마스 이브에 찍은 사진을 보고 가족사진이 생겼다며 좋아했다.

웃는 얼굴에는 비관을 물리친 용기가 있었다. 참으로 아름다웠다엄마는 잊지 않고 찾아오는 정배에게 참으로 고맙다고 했다.

정배는 자기의 아람치가 있는 둥지를 좋아했다아버지 어머니 하고 부르는 것이 정배의 감사라는 것을 내 커서 이제 알 것 같다.

그 해 우리가 함께했던 크리스마스 이브에 다시 태어난 것이라고 생각되어진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바빠진 나이를 살고있을 정배가 우리집에 더는 못와도 좋고, 안오는 것이라해도 참으로 좋다. 천생배필을 만나 아들딸을 많이 두었으면 좋겠다내 기도가 닿아 그의 미래를 행복하게 해주기를 바래본다.

올 크리스마스에는 흰 눈이 펑펑 오면 좋겠다. 정배가 우리생각을 많이 하도록.   (*)